가을의 초입
그러나 오늘 아침의 바람은 스산하기까지 하다
아직 가을 색이 다 물들기도전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옷깃을 여미며 전등사로 향하는 길
가을길은 어디를 가나 차암 아름답고 곱다
전등사를 방문한 건 10월 13일^^
전등사에서는 10월14일부터 열리는 《삼랑성 역사문화축제》준비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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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섬에 창건된 고찰"
강화도는 섬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있다.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의 조성,서양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있다.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 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앞에 자리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란불사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었다. 당시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라 하였다.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고종 46년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하는 불교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1266년)시켰으며,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않는 복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당시 정화궁주는 인기스님으로 하여금 바다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 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충혜왕,충정왕 때에 이어 중수되었다.
"조선왕실과 전등사"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 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으로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 불사가 이뤄지기도했다.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함대를 물리치게했다.
이때 양헌수장군은 휘하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군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관군 뿐만 아니라 경기ㆍ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대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위해 양헌수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히 찾는 수도권 최고의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의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위의 글은 전등사 홈페이지의 <창건배경 및 역사 >를 고스란히 베껴적은 글입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화 032-937-0125
팩스 032-232-5450
●전등사입장료
*어른:3,000(단체30인이상 2,500)
*청소년:2,000(단체30인이상1,500)
*초등학생:1,000(단체30인이상800)
*경로(65세이상):무료(신분증제시)
그냥보면 아무 것도 아닌 곳이 설명을 듣고 나면 의미있는 장소로 거듭난다
도종환시인의 <담쟁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다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들은 또 다른 생명을 위해 헌신하겠지...
반드시 남문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 창건배경등 이 유난히 어렵다
역사를 알아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들이 참 방대하여 여기저기 뒤적여보다가 전등사 홈페이지의 내용을 한 자 한 자 적어보니 이해가 빠르게 왔다
핵심만을 뽑아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참 전등사 나부상 전설을 빼먹은 듯!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사람모습을 조각해놓았는데 이를 두고 전등사의 나부상이라 한다
도편수가 인근의 젊은 주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맡겼는데 그 여인은
도편수가 절을 짓는데 전념하는 사이에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나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도편수는 평생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고 살면서 참회하라고 대웅전 네 귀퉁이에 벌거벗은 여자의 형상을 조각해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바람은 스산하기까지 하다
아직 가을 색이 다 물들기도전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옷깃을 여미며 전등사로 향하는 길
가을길은 어디를 가나 차암 아름답고 곱다
나녀상으로 더욱 유명한 사찰
전등사를 방문한 건 10월 13일^^
전등사에서는 10월14일부터 열리는 《삼랑성 역사문화축제》준비가 한창이었다
전등사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싶어 전등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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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섬에 창건된 고찰"
강화도는 섬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있다.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의 조성,서양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있다.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 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앞에 자리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란불사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었다. 당시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라 하였다.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고종 46년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종46년(1259년) 임금이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5년(1264년),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하는 불교행사를 일컫는다. 원종 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런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의 사세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1266년)시켰으며, 16년이 지난 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않는 복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당시 정화궁주는 인기스님으로 하여금 바다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 대조루를 중건 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의발을 상수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전등사는 고려왕실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찰이었던 만큼 그 후에도 충숙왕,충혜왕,충정왕 때에 이어 중수되었다.
"조선왕실과 전등사"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 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으로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 불사가 이뤄지기도했다.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함대를 물리치게했다.
이때 양헌수장군은 휘하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군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관군 뿐만 아니라 경기ㆍ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대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위해 양헌수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히 찾는 수도권 최고의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의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위의 글은 전등사 홈페이지의 <창건배경 및 역사 >를 고스란히 베껴적은 글입니다^^
남문주차창에 내려 고즈넉한 산사의 길을 걸어 올라가니 ...
●전등사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화 032-937-0125
팩스 032-232-5450
●전등사입장료
*어른:3,000(단체30인이상 2,500)
*청소년:2,000(단체30인이상1,500)
*초등학생:1,000(단체30인이상800)
*경로(65세이상):무료(신분증제시)
요즘엔 이렇게 친절하게 관광지마다 해설사님들이 계시다
그냥보면 아무 것도 아닌 곳이 설명을 듣고 나면 의미있는 장소로 거듭난다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정열의 꽃 사루비아가 대웅전 뒷편으로 곱게 피어있었다
곱게 물들어 가는 담쟁이^^
도종환시인의 <담쟁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다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바스락거리며 생명을 다 한 낙엽
이들은 또 다른 생명을 위해 헌신하겠지...
남문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으면
반드시 남문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나 둘 저마다의 소원을 담은 돌탑들! 비워야하는 부처님 집에 와서 또 속절없이 또 하나의 소원을 빌어본다 ...
강화도의 사찰들은
그 창건배경등 이 유난히 어렵다
역사를 알아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들이 참 방대하여 여기저기 뒤적여보다가 전등사 홈페이지의 내용을 한 자 한 자 적어보니 이해가 빠르게 왔다
핵심만을 뽑아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참 전등사 나부상 전설을 빼먹은 듯!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은 규모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사람모습을 조각해놓았는데 이를 두고 전등사의 나부상이라 한다
도편수가 인근의 젊은 주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맡겼는데 그 여인은
도편수가 절을 짓는데 전념하는 사이에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나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도편수는 평생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고 살면서 참회하라고 대웅전 네 귀퉁이에 벌거벗은 여자의 형상을 조각해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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