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유서
-류시화-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이 되어버린 내 작은 노트 위에
마지막 눈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하얗게 돌아선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페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조각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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