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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좋은글,좋은책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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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랄루딘 루미 [여인숙] 여인숙 -잘랄루딘 루미-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의 14-15p에 실린 詩^^ *류시화 엮음 *펴낸 곳: 오래된 미래 *1판1쇄:2005년 3..
알프레드 디 수자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의 18p에 실린 시 *류시화 엮음 *펴낸 곳: 오래된 미래 *1판1쇄:2005년 3월 15일
오광수시인의 [세상의 첫날] 세상의 첫날 -오광수 詩- 바다는 늘 세상의 첫날이다 어떤폭설로도 뒤덮이지 않고 엄청난 폭우에도 넘치지 않는다 태양을 질료 삼아 꽃을 피워낸바다가 선착장 주막으로 들어서는 저녁 바닷속에서는 늘 그만큼의 물고기가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혹등고래부터 노랑가오리나 고등어도 넘치지않는 꿈으로 바다를 헤엄친다 웬만한 일로는 흔들리지않는 바다가 밤새 통곡할 때도 있다 포구로 돌아오지 못한 지식을 부르며 어미들이 울부짖을때면 바다는 집채만 한 어깨를 들먹이고 소풍나왔던 멸치 떼도 숨을 죽인다 슬픔이 잦아들지 않는 밤과 새벽 지나 허기진 갈매기 몇 끼룩거리며 먹이를 구하는 아침 집게발을 곧추세운 어린 게 한마리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고요를 헤집는다 ------- 월간중앙 세상을 보는 힘 2024/1에 실린 詩^^
조동화님의 시 [관계] 관계 關係 -조동화 시- 1 겨울 뜰에 난만한 피라칸사스 한 그루 가까이서 보면 다닥다닥 붙은 열매들이지만 멀찍이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진홍의 꽃떨기다 어쩌다 눈이라도 펑펑 쏟아진 날이면 이것은 또 꽃이라기보다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2 겨울 들면서 무당새 한 마리 아침이면 어김없이 피라칸사스를 찾아온다 와서는 욕심내지 않고 꼭 붉은 열매 네댓 알씩 쪼아 먹고 간다 무당새의 작은 심장을 겨울 내내 뛰게 하고 깃털에 싸인 엄지만한 그 몸을 뜨겁게 달구며 앙증맞은 부리가 쏟아놓는 홍보석들과 창공에 무수히 아롱지는 날갯짓까지 넉넉히 펼쳐내는 변용의 힘. 불가해不可解의 열매여! 인간은 한갓 볼거리로 피라칸사스를 뜰에 옮기지만 나무와 새의 보이지 않는 고리는 늘 저렇듯 오묘하게 이어져 있다 *조동화시집 《나 하나 ..
조동화님의 시 [소록도] 소록도 -조동화 詩- 그 이름처럼 작은 사슴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형天刑의 서러운 사람들이 한하운韓何雲을 알기 전부터 애절한 보리피리 하나씩 가지고 사는 아득한 적소謫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모든 인간사를 두고 섬에 든 지 오십 년, 혹은 육십 년... 처음 수평선은 타는 그리움이더니, 그 다음은 또 캄캄한 절망이더니 끝내는 다문 입술 무심이 되고... 철썩철썩 부서지는 파도 속에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지고, 코가 무너지고, 더러는 시신경도 끊어져 늦가을 잔양殘陽처럼 사위어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승을 등지고 돌아앉아 오직 내세來世의 소망을 앓는다 물이 빤히 보여도 그 어느 절해고도보다 먼 먼 섬, 그리고 아픈 섬 다행히 키우는 도야지들은 문둥이를 모르고 해마다 봄은 먼져 와 정월에 벌써 산비탈 황토밭마다 ..
천양희 님의 [참 좋은 말] 참 좋은 말 -천양희 詩-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12-13p에 실린 시 *펴낸곳: 북 카라반 *지은이: 천양희,신달자,문정희,강..
나태주님의 시[사랑, 그것은] 사랑, 그것은 -詩 나태주- 천둥처럼 왔던가? 사랑, 그것은 벼락 치듯 왔던가? 아니다 사랑, 그건은 이슬비처럼 왔고 한 마리 길고양이처럼 왔다 오고야 말았다 살금살금 다가와서는 내 마음의 윗목 가장 밝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너는 내가 되었고 나는 네가 되었다. *나태주시집 [아가랑 시랑 엄마랑]의 38-39p에 실린 詩^^ *펴낸곳: 주식회사 홍성사 *2023.4.20 초판 1쇄
마종기시인의 [는개의 시간] 는개의 시간 -詩 마종기- 숨가쁘게 바쁜 의사였을 때 밤사이에 모인 죽음을 새벽녘에 보내며 가책의 낮은 소리로 두 눈을 감기면 는개는 창밖에서 비린 눈물을 보였지. 아니면 내가 나를 다 지우고 싶었나, 체념한 몸을 털고 숨 거둔 환자들이 늦봄의 형이 되어 나를 위로해주었지. (는개는 언제부터 다가온 것일까.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나를 통째로 적신 것일까, 언제 시작을 한 것인지 끝이 난 것인지도 모르고, 몰려오는 오한에 몸을 떨기만 했다.) 70여 년 평생의 친구는 연락도 없이 메모 한 장 남기고 죽었다는 전갈, 한숨 쉬는 하늘과 정적이 어둡게 닫히고 먼 는개가 다가와 내 눈을 적시는구나. 그래도 떠나는 뒷모습이 편안했었다니 내 옆에 남겠다는 그 약속만은 믿겠다. 낯선 나라 너른 들판은 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