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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님의 시 [거목의 최후]

거목의 최후
-박노해-

바람 부는 겨울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고 있었다
한 생의 사명을 다한 거인이
엷은 미소를 짓고 떠나가듯
천천히 대지를 향해 눕고 있었다.

성냥개비보다 작은 몸으로 태어나
수만 배가 넘게 몸을 키워온 나무가
그보다 수만 배가 넘는 푸른 숨결을
묵묵히 지상에 바쳐준 저 나무가
이제 세상쯤은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수직에서 수평으로 쓰러지며
장엄한 한 생을 뉘이고 있었다

그가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흔들리고 부러지며 서 있던 자리에는
문득 공간이 환하게 열리고
그 텅 빈 고요와 쓸쓸함 사이로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고
시린 하늘이 가득히 차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