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오름의 비가
-소년과의 패러글라이딩
이생진 詩
너는 패러글라이딩이 처음이니?
아홉 살에 변을 당했으니
그동안 네가 살았다면 지금 몇살이지
쉰셋?
그럼 44년(1948-1992) 동안 망각의 굴 속에 있었단 말인가
빌어먹을
말하자면 세월이 정지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아니면 세월을 패앗겼다는 이야기인가
그걸 돌려받을 순 없나
그건 어디서 보상해주느냐 이거야
두고두고 불쾌한 악몽이여
하늘엔 오래 머물 수 있는 쉼터가 있을까
바람은 지혜로우니
바람을 잘타면 하늘에서도 쉴 수 있지
오늘은 바람을 실컷 이용해야 돼
바람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나 그렇다
그래서 화가들은 부러진 나무를 그리고
쓰러진 파도를 일으켜 세우려고 붓에 힘을 주는 거지
파도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냐
모두 바람의 힘이지
사람은 바람이 들어야 멋이 있어
나는 다랑쉬오름에 올라와서야 그걸 알았어
분화구 가득 바람을 담아봐
너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듯
가볍게 세상을 들어 올릴 테니
그때 사람이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단 말이지
그러나 그때 조심해야 해
바람을 알아야 패러글라이더를 조정할 수 있어
바람은 그것을 띄울 뿐 아무런 책임을 지지 못해
그것이 바람의 권력이자 책임 소재야
허나 예술은 바람만으로는 안 돼
그건 허풍이지
역시 그건 사람의 일이야
사람이 붓을 조절하듯
패러글라이딩은 바람을 조절해야 해
불조심보다 바람을 조심하라구
바람이 죽으면 화염은 저절로 죽게 돼 있어
그러니 세상은 보이는 불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더 무섭다니까
*4ㆍ3사건 때 다랑쉬굴 속에 피신했다가 토벌군의 초토화 작전에 희생된 아홉 살 소년과의 공중대화
*이생진시집 [어머니의 숨비소리]44-46p에 실린 詩
*출판사: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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