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좋은글,좋은책 모음^^ (465) 썸네일형 리스트형 정연복님의 시 [2월] 2월 -정연복- 일년 열두 달 중에 제일 키가 작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어리광을 피우지도 않는다 추운 겨울과 따뜻한 봄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 해마다 묵묵히 해낸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기어코 봄은 찾아온다는 것 슬픔과 고통 너머 기쁨과 환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음을 가만가만 깨우쳐 준다 이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 나를 딛고 새 희망 새 삶으로 나아가라고 자신의 등 아낌없이 내주고 땅에 바싹 엎드린 몸집은 작아도 마음은 무지무지 크고 착한 달 도종환님의 시 [담쟁이]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다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안도현님의 시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등거리다가 어찌 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드렸으리라 껍질이 딱딱해 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울컥...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가 다 모성을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꽃게의 등 뒤로 간장을 쏟아 붓는다. 엄마 꽃게는 침잠해 들어가며 자신의 분신 알들을 안심시키려 말을 한다.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정용철님의 시 [사랑하면 기다립니다] 사랑하면 기다립니다 -정용철- 온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과 들도, 봄과 겨울도, 눈물과 웃음도 나를 기다립니다. 해가 뜨면 나는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해가 지면 나는 다시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사랑하면 기다립니다.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사랑하면 기다립니다. 아무리 멀고 험해도 사랑하면 돌아옵니다. 당신 가슴에 기다림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당신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아름답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조미하님의 [쉼표] 쉼표 -조미하- 무엇이 그리 바쁘던가 한 번쯤 쉬어가면 어떠리 기계도 기름칠하고 쉬게 해줘야 별 무리 없이 잘 돌아가지 않는가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하나라도 내려놓으면 큰일 날 듯하지 말자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한 번쯤 모두 내려놓고 쉬어가자 잠시 찍어보는 내 삶의 쉼표는 어떤가 브레이크 없는 내 삶이 너무 안쓰럽지 않은가 이외수님의 시 [더 깊은 눈물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 이외수-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도종환님의 시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 도종환 -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들판일수록 좋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한 장일수록 좋다 누군가가 와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빛깔의 여백으로 가득 찬 마음, 그 마음의 한쪽 페이지에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을 마시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우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마르지 않고, 나누어 마시면 마실수록 단맛이 난다 사랑은 가난할수록 좋다 사랑은 풍부하거나 화려하면 빛을 잃는다 겉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은 속으로는 알찬 수확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풍요롭게, 포장은 검소해야 오래 가는 사랑이다. 허유님의 시 [겨울비] 겨울비 -허 유- 마음은 춥고 사랑 가난할 때 겨울비 내리다. 저 창 너머 잡다한 인생의 관계들 이부자리 개듯 다독거려 정돈할 양으로 이 겨울비 한벌의 무거운 적막을 입고 내리다 내 이제 그리운 마음 하나하고도 별거하고 잡아줄 따뜻한 손길마저 저 늙은 나뭇가지의 거칠음 같거니 또 내세의 우물을 현세의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이 한정 없는 부질없음으로 절망하노니 이때 아프게 아프게 하필 겨울비 내린다.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5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