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761)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기철님의 시 [낙엽의 길따라 백 리만 가고 싶다] 낙엽의 길 따라 백 리만 가고 싶다 -이기철- 시월 하고 부르면 내 입술에선 휘파람 소리가 난다 유행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맨드라미들이 떼를 지어 대문 밖에 몰려와 있다 쓸쓸한 것과 쓰라린 것과 슬픈 것의 구별이 안 된다 그리운 것과 그립지 않은 것과 그리움을 떠난 것의 분간이 안 된다 누구나를 붙들고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이마에 단풍잎처럼 날아와 앉는다 연록을 밟을 때 햇빛은 가장 즐거웠을 것이다 원작자를 모르는 시를 읽고 작곡자를 모르는 음악을 들으며 나무처럼 단순하게 푸르렀다가 단순하게 붉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고요한 생들은 다 죽음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다녀올 수 있으면 죽음이란 얼마나 향기로운 여행이냐 삭제된 악보같이 낙엽이 진다 이미 죽음을 알아버린 나뭇잎이 내 구두를 덮는다 사.. 이기철님의 시 [해바라기] 해바라기 -이기철- 온 세상을 다 바꿔버려도 해바라기는 바뀌지 않는다. 온 세상 다 빨간 칠을 하여도 해바라기는 노란 색이다 산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러도 해바라기는 놀라지 않는다 억수 같은 소낙비 속에서도 해바라기, 그 가는 목은 꺾이지 않는다 꼿꼿하고 싶지만 생각이 깊어서 목을 숙인다 며칠 앓다가 나가 보면 해바라기가 크게 우는 징 같다 나뭇잎이 쇠는 날도 해바라기는 불타오른다 시퍼런 여름날을 지그시 누른 그 얼굴을 보며 '내가 누군가'를 하루의 바깥에서 묻는다 *펴낸곳:시정시학 *이기철시집 《꽃들의 화장 시간》23p에 실린 詩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놓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허락하시어 그들을 완성해주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 고독하게 살아갈 것이며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 애너벨 리 -에드거 앨런 포- 아주 아주 오랜 옛날 바닷가 한 왕국에 애너벨 리라고 불리는 한 소녀가 살았다네. 나를 사랑하고 내 사랑받는 일밖에는 아무런 다른 생각도 없는 그녀가 살았다네. 나 어렸었고 그녀도 어렸었지. 바닷가 이 왕국에. 그러나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다네.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들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만큼. 그것이 이유였지, 오래 전, 바닷가 왕국에 바람이 구름으로부터 불어와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하였다네. 그리하여 그녀의 지체 높은 친척들이 찾아와 내게서 그녀를 데려가 바닷가 이 왕국의 무덤에 가둬버렸다네.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반쯤밖에 행복하지 못한 천사들이 그녀와 나를 시기한 탓이었네. 그렇지! 그것이 이유였지. (바닷가 이 왕국의 모든 사.. 헤르만 헤세의 [어머니께 ] 어머니께 -헤르만 헤세- 이야기할 것이 참 많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객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를 이해해준 분은 어느 때나 당신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드리려던 나의 최초의 선물을 수줍은 어린아이처럼 손에 쥔 지금 당신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있으면 이상히도 슬픔이 씻기는 듯 합니다. 말할 수 없이 너그러운 당신이, 천 가닥의 실로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고민들에 대해 인내함을 가져라. 고민 그 자체를 사랑해라. 지금 당장 답을 얻으려 말라.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 그대로 살아보는 일이다. 지금 그 고민들과 더불어 살라. 그러하면 언젠가 미래에 너 스스로 알지 못하는 그 시간에 삶이 너에게 답을 가져다줄 것이리니. 복효근님의 시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창비교육,2016)- 문정희시인의 [나무학교] 나무학교 -문정희 시-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이전 1 ··· 29 30 31 32 33 34 35 ··· 96 다음